▲ 트롤링은 무려 '연구 대상'이 될 정도로 게이머들의 주된 심리 중 하나다 (사진제공: 게임과학연구원)
지금은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잠시나마 카트라이더 드리프트에 큰 인기를 몰고 온 콘텐츠가 있다. 라이즈 업데이트 아이템전에서 만나볼 수 있던 각 캐릭터별 참신한 ‘공격’ 시스템이 그것이다. 지나가던 상대를 막고, 충돌하고, 부딪치고, 낙사하는 적의 원성을 유발하는 공격은 원초적인 ‘트롤링’의 재미를 공식 콘텐츠로 편입하며 호평을 받았다. “사람이 다섯이 모이면 반드시 한 명은 쓰레기가 있다”라는 대현자 지로보 선생님의 말씀이나, “롤은 1:9 게임이다” 같은 명언을 곱씹어보자면 게이머들은 모두 마음 속에 하나쯤 ‘트롤’에 대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소개할 게임 ‘사보트릭스(Sabotrix)’는 이 ‘트롤’ 행위를 게임의 핵심 콘텐츠로 삼았다. 정리형 퍼즐의 끝판왕 ‘테트리스’를 변형해, 내려오는 막대를 가로막고 퍼즐 곳곳에 구멍을 내며 필드를 엉망으로 만들어 몬스터를 처치하면 된다. 트롤짓만 해도 세상을 구하는 게임, 하지만 PvP 콘텐츠가 나오는 순간 우정은 못 구할 듯한 게임. 사보트릭스 개발사 ‘창천게임개발’의 시원준 대표와, 최동연 아트 디렉터를 만나 게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팀의 방향성을 들어봤다.
▲ 창천게임개발 최동연 아트 디렉터(좌), 시원준 대표(우) (사진제공: 창천게임개발)
사보트릭스, 몬스터에게 하는 트롤은 정의구현일까?
국내 인디 개발사 창천게임개발이 만드는 ‘사보트릭스’는 세계에서 가장 익숙한 퍼즐인 ‘테트리스’를 정면으로 뒤집어, 테트리스를 하는 AI를 방해하는 것이 목표인 ‘트롤링 퍼즐 로그라이크’다. 매트릭스 세상을 망가뜨리려는 괴물을 저지하기 위해, 소녀들이 각자의 능력을 활용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를 독특한 매커니즘으로 풀어냈다.
게임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줄을 지우려는 몬스터의 블록 사이에 플레이어의 블록을 삽입하며 줄을 지우지 못하게 하고, 블록으로 둘러싸인 ‘빈 공간’에 비례하는 대미지를 입혀 적을 처치하는 것이다. 만약 몬스터의 블록이 지워지지 못해 특정 위치까지 쌓인다면 궁극기 수준의 대미지를 입힐 수도 있다. 반면, 몬스터가 자신의 블록으로 한 줄을 만들어 소거할 경우에는 플레이어가 대미지를 입는다.
▲ 사보트릭스 플레이 이미지 (사진제공: 창천게임개발)
게임은 로그라이크 요소를 포함해, 매 판 다른 특성과 능력 조합을 통해 다양한 전략을 시도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밸런싱의 경우, 플레이 중 유저가 시도한 강력한 조합이나 시너지가 고점을 돌파할 때 찾아오는 강렬한 경험을 중시할 전망이다. 유저가 시도한 다양한 조합이 기획 의도보다 훨씬 강하더라도, 이를 억제하거나 규격화 할 의향은 적다는 것도 첨언했다.
최 디렉터는 게임의 기원에 대해 “카트라이더의 ‘막자’(상대 플레이어의 진로를 막아 정상 주행을 방해하는 행위)에서 떠오른 게임이다. 원래 있는 규칙을 정면으로 깨뜨리고, 누군가의 계획을 망가뜨리는 데서 오는 재미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소회했다. 시 대표 또한 “빈 공간이 게임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겉보기에는 테트리스와 비슷하지만 바둑과도 유사한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발은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개발을 함께 할 구성원이 적어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던 최 디렉터가 틈틈이 도트를 배워 게임 아트를 만들고, 시 대표가 프로그래밍에 더불어 사업자 등록 등 다양한 업무에 뛰어들며 분투했다. 이런저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사보타주와 테트리스라는 이름을 더한 ‘사보트리스’라는 이름도 ‘사보트릭스’로 변경됐다. 스팀에 ‘사보트리스’라는 게임이 먼저 출시됐다는 점도 게임명 변경의 핵심 사유가 됐다.
▲ '사보트릭스'라는 명칭이 될 때 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고 (사진제공: 창천게임개발)
동아리에서 시작된 인연, 창천게임개발
창천게임개발은 대학교 동아리에서 최동연 아트 디렉터의 기획에 관심이 생긴 시원준 대표가 함께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당시 개발했던 게임은 개발 인원 대비 많은 코스트를 요구해 불가피하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 최 디렉터가 아르바이트 중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다시 시 대표에게 연락을 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두 개발자가 말하는 창천게임개발의 정체성은 ‘과감한 실험’이다. 시 대표는 창천게임개발의 장점에 대해 “두 명이라서 오히려 더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다. 리스크가 적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을 살려 규칙을 깨는 특이한 게임들을 계속 시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 디렉터 역시 “우리는 ‘이상한 게임을 만드는 회사’로 기억되고 싶다. 기존 장르의 틀을 깨는 기획을 계속 시도할 예정”이라며 창천게임개발의 비전을 명확하게 짚었다.
▲ 모두가 '맞추는' 일에 집중하는 퍼즐을 망가뜨리는 전복적 시도가 게임의 핵심이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사보트릭스의 실질적 개발 기간은 약 8개월이다. 그러나 그 앞에는 약 1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두 사람에 따르면, 사보트릭스의 초기 설정은 테트리스의 패러디 게임이었다. 단순한 패러디였기에 블록(테트리미노)의 색과 모양 등 핵심 골자를 유사하게 두고, 공모전에 제출해 수상도 하는 등 나름의 재미를 인정받았다. 다만, 개발 및 연구 과정에서 상업적 출시가 어려운 요소가 있음을 확인하고 재구축을 시도했다고.
시 대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테트리스와 겹치는 부분은 전부 걷어내자는 원칙을 세웠다. 블록 디자인, 보드 크기, 규칙, 심지어 게임 명칭까지 모두 바꿨다. ‘블록을 쌓는다’는 기본 전제 하나만 남기고, 완전히 새로운 게임을 만들자고 결심했다”며 사보트릭스 개발 초기에 있었던 경험을 소회했다. 이어 “지원사업에서 떨어지면 접자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선정이 됐고, 덕분에 본격적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라며 한국콘텐츠진흥원 지원사업에 선정됐던 경험을 소회했다.
두 개발자는 안정적인 개발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이어나갔다. 다양한 지원정책을 찾고, 활로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부업이나 지원사업 탐색에도 힘썼다. 메이플스토리 월드 크리에이터 활동 또한 개발 안정화에 큰 도움이 됐다. 사업 선정을 통해 지원금을 확보하며 안정적인 개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고, 더불어 기초적인 서비스 과정도 경험할 수 있었다고. 더불어 펄어비스 등 기업의 지원을 받아 BIC에 참가하며 국가, 혹은 선배 기업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 메이플스토리 월드 크리에이터 활동 등, 안정적인 개발 환경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다 (사진출처: 메이플스토리 월드 공식 홈페이지)
▲ 초기 게임 '사보트리스'는 테트리스의 원형이 많이 남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영상출처: 창천게임개발 공식 유튜브 채널)
올 한 해 동안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간 두 개발자는 지스타 2025에도 자리했다. “전시 일정을 마치고 며칠 동안 그냥 누워 있었다”고 말할 만큼의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고된 일정 이상으로 크게 남은 것은 관람객들의 피드백이었다. 특히 어느 ‘지나가던’ 관람객이 “충전 속도를 4배로 늘려야 한다”고 평가했던 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강렬하게 남았다. 통상적인 온화한 제안이 아닌 직설적인 지적에 홀린 듯 속도를 조정했는데, 이후 회전율과 플레이 흐름이 눈에 띄게 개선됐기 때문이다.
시 대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회전율이 확 올라갔다. 이전엔 플레이타임이 길어 방문객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는데, 시간을 줄이니 게임 흐름이 훨씬 좋아졌다. 저희는 그분을 거의 성인(聖人)처럼 생각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처럼 전시 기간 동안 얻은 피드백은 밸런스와 UX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 개발 방향 교정에도 큰 도움이 됐다며 오프라인 행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오프라인 행사가 가져다주는 노출 효과에 중시했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게임은 상품이다. 사보트릭스는 완전히 만들어 평가 받겠다”
현재 창천게임개발은 사보트릭스 외에도, 디아블로나 마비노기로 익숙한 퍼즐형 인벤토리에서 영감을 얻은 또 다른 프로젝트 ‘불가사리’를 실험 중이다. 아이템을 테트리스처럼 배치해 능력치를 얻는 방식의 퍼즐 게임으로, 한국 '불가살' 설화를 더해 한 줄을 만들면 불가사리가 그것을 먹으며 점차 강해진다는 독특한 매커니즘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듯 두 사람은 사보트릭스 개발 중 부담을 덜기 위한 사이드 프로젝트도 함께 운용하며 효율적이고도 건강한 개발에 힘쓰고 있다.
최선의 목표는 앞서 해보기 출시가 아닌 정식 출시다. 미완성인 앞서 해보기 출시 후 게임을 고쳐나가는 것보다는, 최대한 완성도를 높여 유저들에게 게임을 선보인 뒤 버그 수정과 신규 콘텐츠 연구로 편안한 게임 플레이 경험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튜토리얼 구성, 보스 구조, 캐릭터 추가, 로그라이크 특성 다양화, 밸런스 조정 등 다양한 과제를 고민하고 있다. 출시 전 스팀 넥스트 페스트 참가를 통해 부족한 점을 보완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두 개발자는 “지스타라는 계기로 이렇게 지면상으로나마 게이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꿈만 같다. 사보트릭스를 응원해주시면 저희에게 정말 큰 힘이 된다”라며 앞으로의 창천게임개발의 행보에 많은 관심을 부탁했다. 두 개발자가 입을 모아 말한 것처럼, 사보트릭스는 “작기 때문에 가능한 도전”의 결과물이다. 정식 출시 될 사보트릭스의 모습이 기대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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